제주 4·3 사건이란?
미군정과 경찰에 항거하던 3만명의 제주도민들이
경찰과 우익 청년단에게 피해를 당한 사건
당시 해방을 맞았다. 그렇지만 제주도는 미군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미군은 미곡수집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친일파 였던 경찰을 재임용 시키기도 했다. 이 밖의 많은 사건들로 인해 미군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미군에 대한 저항과 정상적인 대한민국을 되찾기 위해 대략 5만명의 사람들이 3·1절 기념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 3·1절 기념대회에 참여한 6명의 민간인들은 경찰에 의해 사망하게 되었다. 이로서 제주도민과 미군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다. 민간인의 사망으로 민관총파업에 4만여명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죄없는 주민들에게 검거와 고문을 일삼게 된다. 이로인해 또다시 3명의 청년이 사망하게 된다.
때는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였다. 주민들은 무장봉기를 실시한다. 제주도 한라산 기슭에 있는 오름에 있는 봉화마다 불을 붙인다. 이때 제주도민들은 단독선거 반대,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주장하고 있었다. 미군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단독선거 반대를 주장한 제주도민들은 산 속으로 숨어 살았다. 결국 선거는 무산이 됐다. 이에 미군은 제주도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해안으로부터 5km 범위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통행금지 및 총살이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중산간 마을에 살고있는 무고한 사람들을 강제로 해안쪽으로 이주시킨다. 그리고 이 통제에 따르지 않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계엄령도 선포된다. 그리고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며 비인륜적인 행동을 지속했다.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사람들에 대한 잔인한 악행은 지속되었다. 휘발유로 사람을 태우기도 하고 알몸으로 바닷가에 던져넣기도 했다. 제주도민들의 처참한 생활은 끊이질 않았다. 일부의 제주도민들은 항복을 선언했다. 이런 학살은 7년 넘게 계속됐다. 당시 30만명의 제주도민 중에 약 3만명의 제주도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 3만명의 도민들의 대부분은 여성, 아이들, 노약자들 이었다.
제주 4·3사건으로 인해 제주도민들은 "빨갱이" 라는 딱지를 얻게됐다. 이 빨갱이 딱지는 후대에까지 계속됐다. 이는 취직을 비롯한 외국으로의 출입제한까지도 이어졌다. 1980년에대는 제주4·3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위한 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운동을 한 제주대 학생들과 언론인을 포함한 예술인들은 구속되기 일쑤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전국민적으로 4·3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이 대규모로 이뤄졌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 4·3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하였다. 대통령의 4·3사건에 대한 첫 사과였다. 시간이 흘러 2008년에는 제주 4·3사건 평화공원이 만들어지고, 2014년에는 제주 4·3 희생자의 추념일로 지정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제주가 평화의 섬으로 상징되고있다.
이것은 제주도만의 사건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이며 꼭 기억해야만 하는 대한민국의 역사이다. 이들의 후손인 우리가 해야할 일은 제주 4·3사건의 명백한 진실을 널리 알리는 일이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방적인 학살이었고 비인륜적인 행태들이었다. 언제나 어느때나 "상식적이지 못한" 행동은 바로 잡아야하며, 국가라는 단체는 항상 국민을 위해야만 한다. 국가권력이란 국민들에게 폭력을 가하라고 쥐어주는 게 아니다. 옳지 못한 옛 역사를 발판 삼아 언제나 건강한 대한민국 국가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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